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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 평화생태공원 (쿠니 사격장, 평화기념관, 맥간공예)

by seokoon 2026. 4. 26.

 

솔직히 저는 그 장소가 그런 곳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잘 정비된 잔디밭과 산책로만 보고 그냥 예쁜 공원이겠거니 했는데, 안내문 앞에서 걸음이 딱 멈췄습니다. 경기도 화성시 매향리 평화생태공원. 반세기가 넘도록 전투기 굉음이 하늘을 갈랐던 땅이 지금은 이렇게 조용히 사람들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쿠니 사격장, 54년의 기록

1951년, 한국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 이 땅에 미 공군의 쿠니 사격장(Koon-Ni Range)이 들어섰습니다. 쿠니 사격장이란 이 지역의 옛 지명인 고온리(古溫里)를 미군이 영어식으로 표기하면서 굳어진 이름으로, 공식적으로는 한반도 방어를 위한 전술 항공 사격 훈련장으로 운영되었습니다. 54년간 이 하늘 아래 살았던 주민들은 매일같이 전투기의 굉음과 오폭(誤爆), 그러니까 의도치 않게 빗나간 폭탄의 공포를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오폭이란 목표물이 아닌 엉뚱한 곳에 폭탄이 떨어지는 사고를 뜻하는데, 이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하고 한 어린 소녀의 삶이 영구적으로 바뀌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긴 세월 동안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삶의 터전을 되찾기 위해 조직적으로 목소리를 모았고, 결국 2005년 사격장은 폐쇄되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 대법원은 국가 손해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출처: 대한민국 법원). 저는 이 흐름을 현장에서 처음 제대로 알게 됐는데, 솔직히 그때 느낀 건 단순한 감동이 아니라 일종의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공원 내부를 걷다 보면 쿠니 사격장 시절의 존치 건물 여섯 동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 이 공간들은 일부는 전시실로, 일부는 예비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장교 막사와 생활관, 체력 단련실 등이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 있습니다. 녹슨 포탄과 탄피 잔해로 만들어진 예술 작품들도 그 사이사이에 자리하고 있어,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 공간은 전시를 '보는' 곳이 아니라 과거의 소음을 현재의 고요 속에서 상상하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공원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매향리의 핵심 시설과 역사적 경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951년: 미 공군 쿠니 사격장 설치
  • 2005년: 54년 만에 사격장 공식 폐쇄
  • 2010년: 대법원 국가 손해 배상 책임 인정 판결
  • 2021년: 매향리 평화생태공원 개원
  • 2025년 4월: 매향리 평화기념관 정식 개관

평화기념관과 맥간공예, 기억을 담는 방식

평화기념관 건물 앞에 서는 순간, 제 경험상 이건 좀 달랐습니다. 보통 기념관 건물이라고 하면 단정하고 기능적인 구조물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곳은 건물 자체가 메시지처럼 느껴졌습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설계한 이 건물은 붉은 벽돌 외벽과 원형 수직 구조를 조합하여 '과거의 상처와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라는 철학을 담았습니다. 마리오 보타는 교보타워와 리움미술관,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설계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스위스 출신 건축가입니다.

건물의 형태는 '매향리', '박물관', '기념'의 머릿글자를 형상화한 M자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원형 전망대는 추모의 위령비(慰靈碑)를 상징합니다. 위령비란 사망한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을 뜻하는데, 이 전망대는 폭격 대상지였던 농섬과 사격 통제소를 잇는 축 위에 정확히 세워져 있습니다. 8층 정상에서 바라보면 땅과 바다, 하늘이 하나의 시선으로 이어지면서 과거 사격기 조종사의 시점과 피폭 주민의 시점이 동시에 겹쳐지는 묘한 감각이 생깁니다. 이 설계 방식은 '시퀀스 건축(sequential architecture)'의 개념을 적용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시퀀스 건축이란 공간을 이동하는 순서 자체가 하나의 서사가 되도록 설계하는 방식으로, 관람객이 경로를 따라 걸으며 감정적 흐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념관은 2019년 착공, 2021년 준공, 2025년 4월에 정식 개관했습니다. 화성시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이 기념관은 단순한 역사 보존 시설이 아니라 문화·예술·교육 복합 공간으로 설계된 것으로, 내부에는 어린이 체험실과 2층 상설 전시 공간이 함께 운영됩니다(출처: 화성시 문화재단).

공원을 나오기 직전에 들른 화성시 공예문화관에서는 예상 밖의 발견이 있었습니다. 맥간공예(麥幹工藝)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솔직히 뭔가 싶었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말이 안 나왔습니다. 맥간공예란 버려지는 보릿대(麥幹, 맥간)를 얇게 펴 문양을 입히고 투명한 칠로 마감하여 금빛 광택의 공예품을 만드는 기술로,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국 고유의 전통 공예입니다. 완성된 작품 앞에서 "저게 정말 보릿줄기로 만든 건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고, 공원에서 무거운 감정을 안고 걷다가 이 공간에서 뜻밖의 온기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매향리를 한 번쯤 걸어볼 생각이 있다면, 전망대에서 노을이 지는 시간에 맞춰 방문하시길 권합니다. 서해로 떨어지는 저녁 노을이 이 공간의 분위기를 완전히 다른 결로 만들어줍니다. 기억을 걷는 경험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발걸음을 늦춰도 되는 곳, 매향리는 그런 장소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9obmNYPrLH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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