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도 정동길을 여러 번 걸었지만, 솔직히 그냥 덕수궁 돌담길만 보고 지나친 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대로 둘러보니 입장료 무료인 곳들만으로도 하루 종일 알차게 여행할 수 있더라고요. 일반적으로 서울 도심 여행이라고 하면 북적이고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는데, 제 경험상 시청역 주변만 잘 활용해도 지하철 접근성 완벽하면서도 조용히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코스를 만들 수 있습니다.
세실마루와 정동 전망대, 도심 속 숨은 전망 명소
시청역 3번 출구에서 100m 정도 걸으면 서울 도시 건축 전시관 옆 골목이 나오는데, 50m만 더 들어가면 세실마루 전용 엘리베이터가 보입니다. 세실마루는 1970~80년대 우리나라 대표 소극장이었던 세실극장의 옥상정원으로, 현재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등재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미래유산이란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미래 세대에게 전할 가치가 있는 서울의 근현대 유산을 의미합니다(출처: 서울특별시 문화본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분주한 도심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유럽 소도시 옥상정원에 온 듯한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지더라고요. 주황빛 지붕의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이 로마네스크 양식과 전통 기와를 조화롭게 디자인한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11~12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건축 양식으로, 두꺼운 벽과 반원형 아치가 특징입니다. 이 성당은 그 양식에 한국 기와를 얹어 독특한 조형미를 만들어냈습니다.
2021년에 개방된 세실마루는 운영 시간이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이고 매주 월요일은 휴무입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는 일몰 시간대였는데, 덕수궁과 이국적인 성당, 현대식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파노라마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울 전망대라고 하면 높은 타워나 빌딩 옥상을 떠올리는데, 제 경험상 이런 중저층 전망대가 오히려 더 친근하고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기 좋습니다.
세실마루에서 도보 3분 거리에는 정동 전망대가 있습니다. 서소문청사 1동 건물 13층에 위치한 이곳은 올해 5월 리모델링을 마쳤는데, 내부가 깔끔하고 세련된 공간으로 완전히 바뀌었더라고요. 평일 오후 1시 30분부터, 주말은 오전 9시부터 개방되며 내부에는 카페도 있어 차 한잔하며 정동길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냥 전망만 보고 나왔는데도 전혀 눈치 보이지 않는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정동 전망대의 주요 매력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 시원한 통창을 통한 360도 조망
- 세련된 굿즈샵과 포토존
- 무료 개방으로 부담 없는 방문
중명전과 경희궁, 역사가 살아있는 정동 코스
일반적으로 정동길 여행이라고 하면 덕수궁 돌담길만 걷고 끝내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중명전을 꼭 함께 들러보시길 권합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덕수전과 정동극장 사이 골목으로 들어가면 중명전이 나옵니다. 중명전은 1897년 경운궁 확장 당시 황실도서관인 수옥헌으로 지어졌다가, 1904년 화재 이후 고종의 편전으로 사용된 곳입니다. 여기서 편전이란 왕이 신하들과 회의하고 일상적인 국정을 처리하던 공간을 의미합니다.
솔직히 이곳은 마음이 무거워지는 곳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전시관 내부에는 당시 상황을 재현한 공간이 있는데, 일본의 무력과 협박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솟더라고요. 을사늑약은 국제법상 조약 체결의 필수 요건인 군주의 승인 없이 이루어진 불법 조약이었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중명전에서는 헤이그 특사 파견 관련 자료도 볼 수 있습니다.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특사를 비밀리에 파견했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안타깝게도 열강의 무관심 속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 시도 자체가 대한제국의 주권 회복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이고 월요일은 휴무입니다.
중명전에서 도보 3분 거리에는 경희궁이 있습니다. 경희궁은 인조부터 철종까지 10대에 걸친 임금들이 머물던 이궁으로, 여기서 이궁이란 정궁인 경복궁 외에 왕이 필요에 따라 거처하던 별궁을 의미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일본인 학교가 세워지는 수난을 겪었지만, 1980년 서울 중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한 후 본격적인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경희궁에는 세 개의 주요 전각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 숭정전: 경희궁의 정전으로 공식 행사가 열리던 공간
- 자정전: 편전으로 신하들과 회의하던 장소
- 태령전: 가장 안쪽에 위치한 내전
제가 직접 걸어보니 경희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조용하고 편안하게 머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영조가 학문적 관심이 높아 이곳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걸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더라고요. 북적이는 관광지보다 차분한 분위기가 사색하기에 훨씬 좋습니다.
경희궁 내부에는 영렬천이라는 작은 샘터도 있습니다. 옛 기록에 따르면 항상 물이 솟아 마르지 않아 신비롭게 여겨졌다고 합니다. 현재는 숲길 정비 공사가 진행 중이라 봄에는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희궁 관람은 무료이며, 서울역사박물관 후문과 연결되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습니다.
시청역에서 출발해 약 2km 정동길을 따라 걷는 이 코스는 하루 종일 입장료 한 푼 들이지 않고도 충분히 알찬 여행이 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서울 여행에 비용이 많이 든다고 생각하는데, 제 경험상 이렇게 무료 명소들만 잘 엮어도 역사와 문화, 전망까지 모두 즐길 수 있더라고요. 다만 각 장소마다 휴무일과 운영 시간이 다르니 방문 전 꼭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중명전과 경희궁은 월요일 휴무, 정동 전망대는 평일과 주말 개방 시간이 다른 점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