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서울 4대문 안에 1급수 계곡이 흐른다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저는 솔직히 이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했는데, 직접 걸어보고 나서야 진짜라는 걸 인정했습니다. 세검정에서 시작해 백사실계곡, 부암동 골목, 목인박물관으로 이어지는 이 코스는 하루 일정으로 서울 도심에서 자연과 역사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루트입니다.
1급수 계곡과 역사가 공존하는 세검정·백사실계곡 구간
4호선 숙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7016번 또는 1711번 버스를 타면 약 25분 만에 세검정 일대에 닿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간판마다 '세검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 이 동네에서 세검정이 어떤 의미인지를 새삼 실감했습니다.
세검정(洗劍亭)은 말 그대로 '칼을 씻은 정자'라는 뜻입니다. 조선 시대 군사적 논의가 이뤄진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건물은 1941년 인근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77년 겸재 정선의 그림 세검정도를 고증 자료로 삼아 복원되었습니다. 여기서 고증(考證)이란 역사적 문헌이나 유물을 근거로 원형을 밝혀내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그럴듯하게 지은 게 아니라 그림 한 장을 토대로 원형을 되살렸다는 점이 저는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정자 위쪽 산책로를 따라 홍제천을 거슬러 오르면 본격적으로 백사실계곡 구간이 시작됩니다. 이 일대는 서울시가 지정한 생태경관보전지역입니다. 생태경관보전지역이란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거나 자연경관이 우수한 곳을 훼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정한 구역으로, 이곳에서는 입수와 취사가 금지됩니다. 물놀이를 기대하고 오시는 분들이 간혹 실망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는 이 규정이 오히려 이 계곡이 깨끗하게 유지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직접 가까이서 들여다봤을 때, 암반 위로 흐르는 물이 얼마나 맑은지 놀랄 정도였습니다.
서울 4대문 안에서 이례적으로 도롱뇽이 서식한다는 사실도 이 계곡의 수질이 얼마나 우수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도롱뇽은 수질 오염에 극도로 민감한 양서류로, 1급수 환경에서만 서식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서울 도심에서 1급수 환경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 구간의 보존 가치를 증명합니다(출처: 서울특별시 생태경관보전지역 정보).
계곡 중심부로 올라가면 추사 김정희 선생의 별장터가 나옵니다. ㄱ자 구조의 한옥 집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는데, 1920년대까지 건물이 존재했다가 이후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집터 앞으로는 고마리가 무성히 자란 연못 터가 있습니다. 고마리는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로 나물이나 수제비 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제가 직접 보니 그냥 풀처럼 보이는 게 식용 식물이라니 괜히 다시 보게 되더군요.
백사실(白沙室)의 정식 명칭은 백석동천(白石洞天)입니다. 백석은 하얀 돌이 많은 북한산 자락을 뜻하고, 동천은 산과 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별천지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바위에 '백석동천'이라 새긴 마애각자(磨崖刻字)가 남아 있는데, 마애각자란 자연 암벽에 직접 글씨나 그림을 새긴 것을 말합니다. 누구의 필적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점이 오히려 이 장소에 묘한 신비감을 더합니다.
이 구간을 걸을 때 미리 챙기면 좋을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해충 기피제 필수 (습도가 높아 모기가 많습니다)
- 여름 집중호우 직후 방문하면 수량이 풍부해 계곡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입수와 취사는 생태경관보전지역 규정상 금지이므로 물놀이 목적 방문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 세검정에서 현통사까지 도보 약 30분, 현통사에서 집터까지 약 10분 소요됩니다
부암동 골목에서 목인박물관까지, 풍경이 완성되는 마지막 구간
백사실계곡에서 능금마을 방향으로 내려오면 부암동 골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능금마을이라는 이름은 1960~70년대 이 일대가 온통 능금밭이었던 데서 유래했는데, 지금은 도심 개발로 과수원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비닐하우스 텃밭에서 쌈채소를 직접 키워 파는 분을 봤을 때, 이 동네가 아직 그 기억을 조금은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부암동 골목 구간에서는 카페 '소설'을 잠깐 들러볼 것을 권합니다. 인왕산을 통창으로 담아낸 뷰는 저도 예상보다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음료 가격이 부담스럽다고 느끼는 분들도 계시는데, 저는 그 뷰를 직접 보고 나서는 이해가 되는 수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풍경 값을 치르는 셈이지만요.
오늘 코스의 마지막은 목인박물관입니다. 입장료 12,000원에 음료 한 잔이 무료로 포함되어 있고, 3,000평 규모의 야외 정원을 포함해 만여 점의 전통 목조각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입장료가 처음에는 비싸게 느껴졌는데, 정원과 전시, 전망까지 모두 돌아보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곳에서 주목할 전시 항목 중 하나가 용수판(龍首板)입니다. 용수판이란 조선 시대 전통 상여의 앞뒤 끝을 장식하던 목조각 구조물로, 용이 물고기를 입에 문 형상을 통해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유물을 그냥 지나쳤다면 아무 의미를 몰랐을 텐데, 설명을 읽고 나니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동자석(童子石)도 지역마다 차이가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동자석이란 무덤 가장 안쪽에 배치하여 고인의 시중을 드는 역할을 했던 석조물인데, 강화도 지역 것은 크고 단단한 표정이고 제주 지역 것은 크기가 작고 머리카락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제가 직접 비교해 보니 같은 이름의 유물이 지역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꽤 신선한 발견이었습니다.
박물관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솔직히 이번 코스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습니다. 재미난 문양의 전통 창문 너머로 북한산 능선과 한양도성 성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서울 시내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게 걷는 내내 믿기지 않았습니다. 한양도성은 조선 태조가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한 성곽으로, 총 길이 약 18.6km에 달합니다(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전망대 최상단은 여름보다 가을이나 겨울에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계절을 바꿔 다시 한번 찾아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이 코스는 서울 안에서 조용히 걷고 싶은 분에게 특히 잘 맞습니다. 유명 관광지처럼 북적이지 않고, 자연과 역사와 전망이 하나의 동선 위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체력 부담이 걱정되신다면 부암동 이후 목인박물관 오르막 구간에서 속도를 충분히 줄이시고, 중간에 카페나 벤치를 미리 확인해 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줄 코스인 만큼, 한 번 걸어보신 분이라면 가을 단풍 시즌에 다시 찾고 싶어지실 겁니다. 저는 이미 그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