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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천 트레킹 (도심하천, 역사탐방, 북한산)

by seokoon 2026. 5. 2.

서울 한복판에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정릉천 산책로가 바로 그 답입니다. 저도 처음엔 반신반의하며 걸음을 옮겼는데, 북한산 자락으로 가까워질수록 공기가 달라지는 느낌에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같은 서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도심 속 물길, 정릉천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에서 이 트레킹은 시작됩니다. 출구를 나와 내부순환로 교각 방향으로 약 400미터를 걷다 보면 어느새 정릉시장 입구가 나타납니다. 저는 그날도 시장 골목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대형 마트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있거든요. 좌판에 쌓인 나물 한 무더기, 어묵 국물 냄새, 그리고 그 안에서 오가는 말들. 오래된 골목 특유의 온기가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정릉천은 단순한 하천이 아닙니다. 복개하천(覆蓋河川)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이 길이 더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복개하천이란 도시화 과정에서 하천 위를 콘크리트나 도로로 덮어버린 하천을 말하는데, 정릉천은 총 길이 11.9km 중 대부분이 이렇게 덮여 있습니다. 1999년에는 복개 구간 위로 내부순환로까지 놓였습니다. 그럼에도 정릉시장에서 북한산 입구까지 약 2km 구간만큼은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산책로로 남아 있습니다.

이 구간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릉천 별똥대'라는 주민 모임은 하천 환경 보호와 문화 프로그램 운영을 자발적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른바 도시생태계(Urban Ecosystem) 관점에서 보면, 복개와 개발이 진행된 도시 한가운데서 주민 주도로 자연 공간을 유지하는 드문 사례입니다. 도시생태계란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며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도시 내 생태 환경을 뜻합니다. 서울시 전체 하천 복원 현황에 따르면, 복개 해제 및 생태 복원이 이루어진 하천 수는 청계천을 포함해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출처: 서울특별시).

정릉천 산책로에서 놓치면 아쉬운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장미 터널: 푸르지오 아파트 단지 진입로 옆, 예상치 못한 꽃길
  • 개울장: 정릉천변에서 열리는 소규모 플리마켓(현재 운영 여부 확인 필요)
  • 천변풍경 카페: 복고풍 인테리어의 하천변 카페, 오전 일찍은 오픈 전일 수 있음
  • 경국사와 정릉골: 역사와 삶의 흔적이 겹쳐 있는 구간

골목과 절, 달동네가 한 길 위에 있다는 것

정릉천을 따라 걷다 보면 경국사(慶國寺)가 불쑥 나타납니다. 처음 이 사찰 앞에 섰을 때 저는 의외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도심 트레킹 코스 한복판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경국사는 고려 말에 '청암사(靑巖寺)'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워졌습니다. 조선 시대 억불 정책으로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명종 시대 섭정을 맡은 문정왕후가 왕실 재정으로 사찰을 크게 중수하며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일부 기록에서는 현종 대에 정릉 복원 사업과 함께 이름이 바뀌었다는 설도 있어, 사찰 하나에도 왕실 정치와 불교의 흥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경국사를 지나 극락교를 건너면 정릉골 입구가 나옵니다. 담벼락에 '박경리 토지'라는 글자가 보이는 순간,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습니다. 소설가 박경리는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이 정릉골에서 살았으며, 대하소설 '토지' 1권에서 3권까지를 바로 이곳에서 완성했습니다. 정릉골은 1960~70년대 도심 판자촌 정비 과정에서 청계천과 북아현동 주민들이 산기슭으로 밀려오며 형성된 무허가 주거지, 즉 비공식 정주지(Informal Settlement)였습니다. 비공식 정주지란 법적 허가 없이 형성된 주거 공동체로, 도시화 과정에서 소외된 계층이 만들어낸 생존 공간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 정릉골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어 이주와 철거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제가 그 골목 앞에 서 있을 때, 대문마다 붙은 퇴거 스티커와 길가에 뒤엉킨 살림살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래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이 이렇게 사라져가는 장면은, 아무리 재개발이 필요하다 해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더군요. 국토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서울 내 노후 저층 주거지의 재개발 사업은 주거 환경 개선과 원주민 이주 문제 사이의 균형이 지속적인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출처: 국토연구원).

북한산 입구까지, 이 길의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는가

정릉천 산책로의 종착점은 북한산 정릉탐방지원센터입니다. 마지막 구간으로 접어드는 순간, 길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주택가 담벼락이 마치 성벽처럼 쌓여 있고, 물소리는 더 또렷해지고, 도심의 소음은 어느새 멀어져 있습니다. 저는 그 경계를 넘는 느낌이 꽤 분명했던 기억이 납니다. '도시에서 자연으로 들어서고 있구나'라는 감각이 발바닥부터 올라오는 느낌이랄까요.

지금 탐방지원센터가 자리한 곳에는 한때 '청수장'이라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별장으로, 해방 후에는 요정으로, 6.25 전쟁 중에는 특수부대 훈련장으로 쓰였던 곳입니다. 1950년대에는 정릉 계곡물을 끌어와 만든 천연 수영장과 소규모 골프장까지 갖춘 '서울 유일의 야외호텔'로 광고를 냈다고 하니,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이색적인 공간이었을 겁니다. 황순원, 정비석, 박경리의 소설 속에도 청수장이 배경으로 등장할 만큼 한때 이 자리는 서울 문화의 한 축이었습니다. 이제 그 이름은 사라졌지만, 알고 걸으면 이 계곡길이 달리 보입니다.

북한산 국립공원 탐방 안내 정보에 따르면, 이곳 정릉탐방지원센터에서 북한산 둘레길 4구간 또는 5구간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산행을 이어가고 싶은 분들에게는 욕심내볼 만한 동선입니다.

정릉천 산책로는 짧다면 짧은 2km입니다. 그러나 이 구간 안에 복개하천의 역사, 조선 왕실 사찰, 소설가의 집터, 달동네의 마지막 풍경이 전부 담겨 있습니다. 저는 이 길을 걷고 나서 꽤 오래 여운이 남았습니다. 화려하거나 정돈된 코스는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이신설선 정릉역에서 내려 두 시간 정도 여유를 잡고 걸어보시길 권합니다. 정릉시장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출발하면 딱 좋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E4Mrb_FWJ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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